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 주랴 - 김승희
2001년 5월 8일
'달걀 속의 生' 바로 전에 나온 그녀의 세번째 시집 '미완성을 위한 연가'를 소개합니다.

앞 17번 글에서 '달걀속의생'과 '달걀 속의 생'의 답답함의 더하고 덜함을 이야기했었는데, 이 글을 쓰려고 '미완성을 위한 연가'를 꺼내 보니 그제서야 취한 놈 달걀 팔듯 했다는 후회가 듭니다.
'달걀속의생'처럼 '미완성을 위한 연가'도 책 표지에는 '미완성을위한연가'로 실려 있습니다. 아마도 조판 혹은 디자인 상의 문제였던 듯싶습니다.
반성하는 의미로 제 소리는 최대한 줄이기로 합니다. 自序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고로 '미완성을 위한 연가' 전에 나온 그녀의 두번째 시집은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었습니다.)


… <왼손의 광기>에서 <오른손의 슬픔>으로―. 그 동안의 내 삶의 궤적을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 물론 ≪왼손을 위한 협주곡≫과 이 시집 사이엔 나의 철저한 자기 해부적 산문집인 ≪33세의 팡세≫가 있다. 왼손의 광기에서 오른손의 슬픔으로 오기 위해 나는 반드시 ≪33세의 팡세≫를 거쳐왔어야 했던 것이다. 광기와 마녀적 탕진, 생명의 초현실적 남용, 그리고 극단적인 자기 파괴의 끝에 새로운 생성으로서의 오른손의 슬픔은 오는 것이었다.
나의 시는 아직도 '내 몸에 깃든 악귀를 쫓으려는 Exorcism'이며, 시인이란 아무래도 카인의 양녀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삶의 미완성에 크게 저항하는 그만큼 시의 密敎는 융성해지는 것이기에. …

'광기와 마녀적 탕진, 극단적인 자기 파괴'의 모습은 다음 편에 살피기로 하고, 그녀의 슬픔을 보기로 합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열심히 날품을 팔면서,
돌아오는 것은 없지만
돌아오는 것을 믿는 것은 야비한 일이라는
정신적인 금언까지 믿으면서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바퀴벌레처럼 순정적으로

시대는 바야흐로 교환의 시대여서 내가 가진 것으로 품을 팔아야 남이 가진 것을 얻어낼 수가 있지요, 나는 무엇을 가졌던가, 무엇을 가졌길래 무엇으로 나를 팔아넘길 수가 있을까, 나는 교환가치도 없고 생상가치도 없고 소비가치도 없는 그리하여 어디 가서도 교환이 안 되는, 교환불능의 순정이라는 자본만을 가진, 한 마리의 저능한 바퀴벌레처럼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되는 대로 날품을 팔면서
팔 것이 없어서 슬픔을 팔면서,
하얀 적십자병원 뜨락에
힘없이 서서
자기 피를 팔려고
서성이는 사람들,
어서어서 피를 팔아
국밥 한그릇 사먹기가 소원인 사람들,
그것조차 아슬아슬 차례가 안 오는
사람들,

그렇게 살고 있어요,
슬픔을 팔아 끼니를 사고
슬픔을 팔아 별빛을 사며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바퀴벌레처럼 굴욕적으로
- 슬픔의 날품팔이



성모 마리아도 여자였지요. 'hi·s·tory'라는 질곡에 묶인.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는데
나의 절망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기교는 희망을 낳는다는데
나의 기교는 정말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천치 같은 마리아가
홀로 별들을 바라보며
악몽 같은 성령을 수태하고 있을 때
보았는가
청순해서 너무나 청순해서 슬픈
천체의 오물 같은 별들은 으스스―으스스―
화장터의 뼈마디처럼
공해 같은 희망을 비웃으며
천치 같은 마리아를 저주했더니라,
왜 또 희망을 뱄느냐고,
왜 또 희망을 못박아 죽이려 하느냐고,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는데
나의 절망은 기교를 낳지 못한다,
기교는 희망을 낳는다는데
나의 기교는 정말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똥도 안 눈다
젠장, 대변은 커녕 따스한 오줌 한 번
눈 적도 없다……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는데




냉소가 재치를 만나면 매력적입니다.



폭력만화 섹스만화 요설만화
속에
순정만화 하나
멍청히 꽂혀 있읍니다

시를 쓴다고
새벽 세시까지 엎드려 있는
너는
커피잔만큼 코피를 쏟고도
종이 위에 다시 엎드리는
백치 같은
너는
세상은 온통 관절이 잘못 되었다고
그래서 시를 써서
세상의 관절염을 모조리 고쳐주겠노라고
되뇌이는 머리가 살짝 돈
너는
빈혈엔 연애를 하세요
건강에 좋아요
식욕 성욕이 모두 좋게 생긴 의사가 미워
에잇 연애보다는 애연을 하겠소
발악적으로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무는 한심스런
너는

천추에 씻지 못할 슬픔 때문에
천추에 씻지 못할 사랑 때문에
단 하나 가진 밑천
제 몸뚱이만 괴롭히는
병신 같은
너는
그래도 시 한 줄 못 쓰는
그래도 시 한 줄 안 써지는
천치 같은
너는

공포만화 외설만화 스포츠만화
속에
순정만화 하나
시대착오적으로 수절합니다
-순정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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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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