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2001년 5월 13일

혹시 저 밑의 글부터 읽었던 이는 기억할 수도 있겠는데
제가 고등학교 때 강성한 참여시인들 몇 분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김지하, 김남주, 박노해 시인 등이었죠.
그 가운데 특히 운동의 순수로 매진했던 이가 김남주 시인일텐데, - 생활로 보자면 그는 복역 끝에 돌아가셨으니까요.
김지하를 선배이자 70년대 참여시의 선봉으로 놓고
80년대를 김남주가 대표하고 90년대를 박노해가 받쳤다고
거칠게 재단할 때,
김남주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시인이 바로 고정희 시인입니다.

오늘은 그 쪽에서 놀고 있는 친구 덕에 판소리 공연을 공짜로 봤습니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예술회관쯤 되는 공간이 광주에서는 광주문화예술회관인데, 그 곳에서 공연을 보고 나오는데, 인연인지 거기에 고정희 시비가 있더군요.
한 시인의 시비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이야 관심 있는 지역 사람이이나 현대문학자의 몫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딘가를 지나가다 뜬금없이 어떤 시인의 시비를 만나면
참 당혹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역시나 외로이 생뚱맞게 서 있습디다.
잠시 삼천포로 빠지자면, 무등산 자락에 원효사 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은 사통팔달의 왕래하는 자들을 위한 교통의 도로는 아니고, 산 비탈을 낀 호젓한 길이랍니다.
그 길 한 굽이에 정말로 웬만하면 지나칠 밖에 없이 별안간 김현승 시인의 시비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눈씻고 봐야 보인답니다. 시비라는 것이 보라는 것인지 잊으라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들고, 교과서 한 귀퉁이나 산비탈 한 자락이나 어이없이 어울린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땅끝으로 사람들 입을 오르내리는 해남이 시인의 고향입니다. 어릴 때는 저 좋아하는 이를 존경하는 마음이 쓸데 없이 가기도 하는데, 저는 제 고향이 해남이 아닌 것이 속으로 괜히 우울한 적이 있었습니다. 뭐, 고정희 시인 때문은 아니고, 김지하 시인과 황지우 시인과 김남주 시인의 고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었죠. 김남주 시인의 회고를 빌자면 고정희 시인의 아버지와 김남주 시인의 아버지는 동갑내기 친구였답니다.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 거리가 가깝기도 해서 그렇겠지만, '광주'를 속으로 또 속으로 깊숙히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광주는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분노이자 좌절이고 슬픔이고 아픔이며 때로 자긍인 놓을 수 없는 화두입니다.

고정희 시인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이 이렇게 신변잡기에 불과합니다. 사실, 그녀는 유고시집까지 치면 여남은 권의 시집을 냈으니 다작의 시인인데, 저는 유고시집인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말해서는 안될 줄 압니다. 이 시집에 대한 제 인상을 굳이 말하자면, '참 강인한 사람이구나'였습니다. 95년에 읽었을 때는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한 길에 매진한 사람이 있구나. 일신을 버리고 세상으로 온 힘을 쏟을 수도 있구나.

참 중요하므로 시집 제목과 그녀의 약력을 몇 가지 적으면서 글을 마칩니다.


26세, 광주 YWCA 간사
31세, 한국신학대학 졸업
첫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제2시집 <실락원 기행>
제3시집 <초혼제>
제4시집 <이 시대의 아벨>
36세,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38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편집부장 맡음
제5시집 <눈물꽃>
39세, '또 하나의 문화' 동인지인 <여성해방의 문학> 3호 발행 주도
제6시집 <지리산의 봄>
40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맡음
제7시집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제8시집 <광주의 눈물비>
제9시집 <여성해방 출사표>
43세,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사> 편집 제작
제10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
그 해 6월 9일 밤, 지리산으로 떠남. 뱀사골에서 실족, 작고.
다음 해,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하나 골랐습니다. 이렇게 거침없고 당당하며 통렬합니다.


어린 딸들이 받아쓰는 훈육 노트에는
여자가 되어라
여자가 되어라…… 씌어 있다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일하는 여자들이 받아쓰는 교양강좌 노트에는
직장의 꽃이 되어라
일터의 꽃이 되어라…… 씌어 있다
일터의 여자들이 꽃이 되기 위해
손톱을 자르고 리본을 꽂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는 동안
꽃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이빨이 된다

신부들이 받아쓰는 주부교실 가훈에는
사랑의 여신이 되어라
일부종신의 여신이 되어라…… 씌어 있다
신부들이 사랑의 여신이 되기 위해
콩나물을 다듬고 새우튀김을 만들고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사랑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기상이 된다
철학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권력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종교가 여자를 불러 사자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그러니 여자여
그대 여자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사자의 발톱은 평화?
사자의 이빨은 고요?
사자의 기상은 열반?
- 외경읽기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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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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