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 달걀속의生
2001년 5월 3일
달걀 속의 생
보다
달걀속의생
이 훨씬 더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아?

요즘의 시는 더욱 찬밥 신세지.
즉물적이고 즉흥적인 시대에 어떤 경우엔 뒷골이 땡길 수 있는 시가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거 알아?
우리나라, 한국시가 다른나라 시와 완연히 다른 점?

시는 운문이라는데 우리시는 산문이라네.
우리시에는 운율이 없어. - 위험한 발언이니, 약간의 해명을 해야지. 내재율은 발견할 수 있으나, 외형률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이야기임. 압운이 없잖아. 랩보다 신날 수 없는 이유지. 7/5조니 3/4조는 교과서에서나 봤지, 시집 보면서 느껴봤남?
그만큼 노래에서 멀어진 셈이지.

그래서 우리시는 더더욱 어려워지네.
더욱더 꼬이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말지.
가끔 고상하다고 하늘로 훨훨 나는 통에 남들 기분 잡치지만 않는다면 저들의 잔치에서 가끔 얻는 콩고물로도 만족할텐데...

옛적 시와 노래는 다르지 않았지.
한자 대 언문으로 갈리면서 正과 俗의 가르기가 일어났음에도, 시는 정이나 속 어디에든 있었고, 노래 또한 그랬지.
급작스러운 근대는 이 땅에 참 많은 단절을 가져와서
시 또한 노래를 버렸네.
노래라는 물줄기는 넓고도 끝없는 것이라 고급이니 저급이니 가름이 없으나,
시는 고급을 처하며 노래를 저기 발치로 밀어냈지.
당연한 결과로, 시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져갔네.
詩歌라는 이름이 얼마나 생소한가?
근대 이전에는 시가가 있을 뿐, 시나 가요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네.
노래의 가사가 시요, 시를 읊고 부르면 노래였지.


이제는 삼천포로 빠지다 못해 김용옥 짓을 하는군.
갈 길이 구만리인데 서론으로 팔만리 쓰는 짓 말이야.
어쨌든, 그런 우리시 가운데, 김승희의 '달걀속의생'을 소개하네. 벌써 제목에서 짐작하듯, 시인은 이렇게 뒷표지에 썼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데미안 어록은 우리시대의 자아상실, 자기소외, 세계박탈의 감각에 적절한 구원을 제시한다. 나 역시도 보다 나은 진화를 위해 알 속에 들어 있지만, 그래도 역시 알 속의 기다림을 지닌 채로 진화를 꿈꾸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달걀 속의 生> - 그것은 나의 삶이며 그대의 삶이고 우리시대 모두의 삶이면서 진정한 희망의 손이 그리는 '벽 속의 문'같은 영원한 꿈이 아닐 것인가.

워낙, 김승희의 시는 잘 읽히네.
앞서 말했던 대개의 '노래 아닌 시'와 달리 그녀의 시는 너무나 잘 들려.
참 냉소적인 이야기로 가득하고, 아주 섬세하고 독특한 시각이 넘실대지만
차근차근 다정하게 얘기해 주는 듯해.
그냥, 시 한 편의 전문을 옮기며 장황한 내 소리는 마치네.
그저, 어느 서점에 들어가 우뚝 서서 읽어보게.
시가 좋은 몇 가지 안 되는 이유 중 하나.
싼데다 살 일도 드물다네.


가출을 할까
출가를 할까
이것은 나의 영원한 테마이다.
누군가도 그러하리라.
가출을 하든지
출가를 하든지
어딘가에 평화를 구하러 가고 싶은 심정으로
밤은 저문다.

신촌로터리에서 지하철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삼분 자동칼라 사진실이 있지.
시든 베이지색 커튼을 밀치고
들어가면
관 속같이 하얀 네모난 방.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 속의 동전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일금 이천오백원이 될 때까지
동전들을 고백처럼 밀어넣으며
플래시가 번쩍 하는 동안의
그 작은 재회를 사고 싶다.

동전이 찰칵찰칵 들어가 액수가 차면
관 속의 실내등은 저절로 꺼지고
어둠 속에 갇힌 채로
웃을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나의 인생은 그 일초동안의
찬란한 자동 마그네슘 불꽃 안에
영원한 우주의 중심으로 환생하게 된다.

따끈따끈 인화되어 나오는
나의 사진을 기다리며
나는 지하철 정류장을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다 어딘가로 떠나고 있고
모두다 어딘가로 닿고 싶은 사람들.

자동칼라 사진실의 출납창구 아래로
내 사진이 덜컥하고 완성되어 떨어질 때
나는 행복하다.

어제보다 더 늙었다든지
점점 더 괴상한 추녀가 되어간다고 해도
(추함만큼 우리에게 일상적인 게 또 있으랴)
나는 정말 관심이 없다.
다만 나는 나와 만나는
그 짧은 순간의 영원. 어머니. 자궁.
고향 같은 따스한 어둠을 기억할 뿐.
아무도 이제 내가 안보인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나처럼
자기 스스로와 면회하고 싶은 객지의 사람들이
먼길을 걸어와
관같은 자동사진실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호적이 없는 부랑자들처럼
니코틴에 물든 입술이 파랗다.
- 평화일기 2



덤이오.


사랑이여.

나는 그대의 하얀 손발에 박힌
못을 빼주고 싶다.
그러나

못박힌 사람은 못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
- 시계풀의 편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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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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