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덜그덕 2004. 10. 27. 15:03
서울에 다녀옴. - 두 번째 이야기
2001년 10월 14일
시간과 호주머니가 허락하는 한 자꾸 가고 싶은 곳이 헌책방이야.
발견의 기쁨과 저렴의 뿌듯함이
다리품과 어깨품을 이기고도 남는데
광주에는 가볼 만한 헌책방이 '담양서점'말고 없어서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헌책방 갈 일에 살짝 설레지.
녹두에서 나온 '여성 이야기주머니'는 콩트로 읽는 여성학 강의라는데 재미있는 꼭지가 있거든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엔 정현종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지.

숨책에서 발견한 '환합니다'라는 책인데 시인이 고르고 자기 글씨로 쓴 시묶음 가운데 하나야.
정현종 시인이 낸 단행본은 번역시집까지도 다 읽었는데,- 얼마 전에는 원천서점에서 '불과 얼음' 초판본을 900원에 사서는 재판한 것이랑 뭐가 달라졌나 슬쩍 번갈아보기도 했으니까.- 못 보던 것이라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하더라구. 역시 노는 물이 다르고, 파는 밭이 다르면 제대로 알 수가 없다고, 인자 나도 문학소년을 작파하는 때가 됐지 싶기도 해. 그래서 얼른 집을까 하다가 신작시집도 아니고 선집인데 다 본 시 묶은 것을 괜히 사나 싶어 좀 망설이다, 그래도 시인이 직접 고른 시들 묶음이니 구경이나 하자고 샀지.
지난 번에 서울 갔을 때, 준형이 따라 상대 올라 갔다가 우연찮게 만수도 스쳐보고 준형이 일 끝나고 내려오면서
본관 뒤 양버즘나무 아래로 휘적휘적 동문께로 가시는
희끗희끗하고 덥수룩한데다가 무척 큰 머리의 시인을
또 뵈었지. 일학년 땐가 선생 볼려고 수업 넣었다가 개강헌 날, 시험 보는 날 그렇게 두 번 뵙고는 그렇게 거리에서 간혹 마주치는데
눈이 게슴츠레 풀어지면서 그냥 행복해진다니까.
하! 사람이 사람을 이리도 행복하게 하는구나.
설장고 치는 어느 누나의 간드러진 모습을 보거나
기똥차게 불러제끼는 노래 한 대목을 들을 때의
그 질질 쌀 것 같은 그런 기분 말고
음 술 잔뜩 먹은 다음 날 집 앞 수퍼에서 시원한 둥굴레 캔을 한 숨에 벌컥 마시는 시원함 같은.
그 분이 나를 알 리 만무하므로 더 마음 놓고 행복하지.

그 책에서 몇 적으며 이만 줄임.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다시 술잔을 들며
- 한국, 내 사랑 나의 사슬

이 편지를 받는 날 밤에 잠깐 밖에 나오너라
나와서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을 바라보아라
네가 그 별을 바라볼 때 나도 그걸 보고 있다
(그 별은 우리들의 거울이다)
네가 웃고 있구나, 나도 웃는다
너는 울고 있구나, 나도 울고 있다.




마음 놓고

놓은 줄도 모르게
마음 놓고 있으니
아 모든 마음이 생기는구나

지금은
마음 못 놓게 하는 일
마음 못 놓게 하는 자도
다 마음 놓이는구나

사랑도 무슨 미덕도
내 거라고 안 할 수 있을 때
나는 싸울 수 있으리
내 바깥에서만 피어나는
사랑도 미덕도 만나리

마음 놓고
자꾸 모든 마음이 생긴다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덜그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영, 성  (0) 2004.10.27
조운, 시조  (0) 2004.10.27
박지원, 먼저 간 형을 그리며  (0) 2004.10.27
황동규, 무서운 인연  (0) 2004.10.27
고은, 고샅길  (0) 2004.10.27
Posted by dalgi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