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 곡처

덜그덕 2015. 9. 16. 01:26

정훈, 哭妻(곡처)


 가난을 원망하는, 제발 꺼지라고 탄식하다가 그래도 자기 곁에 끝까지 있어 주는 것은 가난밖에 없다며 가난을 껴안는 노래 <탄궁가>(嘆窮歌)로 낮익은 정훈에 대한 나정순의 논문 <17세기 초의 사상적 전개와 정훈의 시조>를 읽었다. 정훈의 시조 20수 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월곡답가〉10수의 대상인 월곡이 누구인가를 추리하면서 16세기에 유행한 강호가도의 새로운 국면을 양란 이후 시대상과 결부시켜 보여주는 논문이다. 논문 내내 내게 비친 정훈은 우국충정에 불타는 열혈 선비였는데, 아내를 잃고 쓴 이 시조가 마음에 콕 박혔다. 


糟糠 三十年에 즐거운 일 업건마난

不平 辭色을 날 아니 뵈엿더니

마리해 늘근 날 바리고 호자 가랴 하시난고


 슬픔이 처연히 다가오는데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그 애이불상(哀而不傷)의 경지가 느껴졌다. 종장에서, 정치적으로 존경할 수는 없는데, 인구에 회자되는 <꽃>의 시인 김춘수가 말년에 역시 아내를 잃고 쓴 <강우>(降雨)가 문득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 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맴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


 어떤 슬픔은 툭 터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늘 곁에 있다가 가만히 스며나와 그간 망각의 시간을 흘겨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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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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