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아들에게 수두 옮기다.
2001년 2월 8일

의사 선생 말로는 처음 고열에 시달릴 때,
그 때가 전염성이 가장 높아서
한동안 접촉만 피하면 된다고 그랬는데

결국, 자식에게 수두를 옮기는 기이한 일이 생겼다.
다행히 아들은 병세가 심하지 않아서 곧 나을 것 같은데
내 얼굴은 좀 많이 얽게 되었다.
깨어 있을 때는 별로 가려운 줄도 모르고 지낸 터라
아예 긁지도 않았는데
잠이란 놈은 그렇지 않아도 상태 별로인 얼굴에 덤태기를 씌우더라.

아직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채로 부산에 사는 사촌형을 만나러 갔었다.
광주에서 부산이라.
거리로나 느낌으로나 상당히 먼 곳이라 생각했는데
세시간 반 밖에 안 걸린다.

우리 형은 안경 기사다.
안경점에서 일하는 이 가운데 한 사람은 사장이고, 나머지 아저씨나 아줌마, 아가씨들은 다 기사라 부른다. 참, 어떤 안경점에는 경리보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단다.
당감동의 어느 시장통에 안경점이 있고
이 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손님이 있는 것은 이번에 처음 봤다.
형 말로는 안경점만 아니면 뭘 해도 성업을 이룰 곳이란다.
500원짜리 식염수 두 통 팔더라.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형 퇴근 시간까지 꽤 기다려야 했는데,
형이나 나나 너무 심심한 나머지
형이 내 안경을 또 해줬다. - 형은 자주 내게 안경을 해줘서 한 십여 개 갖고 있는 듯 하다.

광안리에 가서 회에 소주를 먹었다.
오래 전부터 알아서 서로 야자가 익숙한 형의 애인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면 형수라고 불러주지','도련님 소리도 한 번 못 듣고 벌써 서방님이네' 하면서
회포를 풀고
형의 애인 집에서 뱃속에 알콜 먹고 사는 기생충을 다들 키우는지
더 부딪다가
드러누워 노래를 불러댔다.
형의 애인은 머리가 좋아 가사를 제대로 불러대고
형이랑 나는 가락만 흥얼흥얼 따라했다.
'내가 고백을 하면 아마 놀랄거야, 깜짝 놀랄거야, 사랑이란 이런걸까 이런 마음일까 알 수가 없네....','...영원한 사랑을 찾아 헤매어도 봤지만 언제나 마음 속의 병 때문에 모두 떠나가고....'
나도 한 곡 했다. 드러누워 부르기 참 힘들더라. 목도 쉬이 갈라지고.
'밟았네 밟았어 무엇을 밟았나 시아버지 거시기를 우직끈 밟았네. 춥냐 덥냐 내 품 안으로 오너라 벼개가 높고 낮거든 내 팔을 베어라.'

다음날, 형의 애인은 출근을 하고
동생 온다고 받아 놓은 월차를 우리는 어슬렁대며 보냈다.
점심엔 부산 밖에서 본 적이 별로 없으니 부산 특유의 음식인 듯한
'돼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에서 순대를 빼고 돼지고기를 더 넣으면 그 생김이 비슷하겠고,
맛은 두 끼니 연속은 좀 느끼해서 못 먹겠고 한 끼니 정도는 먹을 만 했다.
아내가 부탁한 하루끼 신작과 임재범 베스트를
어느 큰 서점과 음반 가게에서 각각 사 들고
터미널 근처에서 자리잡고 낮술을 시작했다.

시간은 네 시라, 오가는 이는 많아도 술 먹는 이는 없어서
거리를 내다 보며 주인 아짐과 우리 밖에 아무도 없는 술집서
임재범을 들으며 시원( c1-부산지역 소주의 상품명)을 먹었다.
보해에 익숙한 줄 알았는데 시원도 맛있고 진로도 맛있는 걸 보면
그냥 뭣모르고 소주만 좋은 놈에 분명하다.

오랜만에 만난 정깊은 사람들의 대화가 대개 그렇듯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더욱 열심히 잘 살기를 바라고
지 앞가림이 안 되어도 상대의 근심을 걱정하고
또 식구대로 건강하기를 빌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버스를 타면서
쓸쓸한 것도 뜨뜻한 것도 아닌 그렇다고 미지근하거나 무덤덤한 것은 더욱 아닌
이상한 기분에 괜히 눈시울은 붉어질 것 같아
스물여섯, 스물아홉.

"그대 조으는가
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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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