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이연주
2001년 5월 25일
봄은 가는 줄도 모르게
여름이 온 듯합니다.
그 쪽은 얼마나 덥던가요.


사람 사귐에도 간혹 그러듯이
어떤 것에든
참 뜬금없이 친해져서 오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다 친해졌지?
참 이상하고 질긴 연인가 봐.

제가 아직도 빼보는 몇 시인 가운데
그런 이의 대표로 이연주 시인이 있습니다.
이 시인을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접했는데
어쩌다가 보게 됐는지, 어째서 아직도 간혹 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첫 시집은 제목도 살벌한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인데,
정말 무섭고 가슴이 애립니다. 두 번째 시집의 해설을 한 이의 표현을 빌자면,
'이연주의 시들을 읽어내는 일은 고통스럽'지요.
죽음, 피고름, 절망, 불안, 소외, 처절함 등등의
온갖 어둡고 가까이 하기 싫은 것들로 가득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귀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아요.
53년생이니까 생존했다면 '아직은 마흔아홉'의 나이군요.
92년에 자살했습니다.

간 줄도 모르고 봄이 간 듯해서
이연주 시인의 그 중 부드러운
'봄날은 간다'를 적어 봅니다.



토요일 오후 봄날
어른 셋에 여자아이 하나가 거실에 있다
아이는 몇 해를 숨어 있었는지 모를
박제가 돼버린 이상한 나무열매를 들고 있다
솜털에 박힌 마른 씨앗을 하나씩 뜯어내더니
- 아줌마, 땅에 심으면 나요?

아이가 베란다 돌밭으로 간다
잠이나 잤으면 싶은 봄날
- 꼭꼭 눌러줄 돌을 찾아봐라
싹이 되려면 큰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무거운 돌의 힘이 필요하니까

거실의 노란빛 조명등이 웃는다
어른 셋이서 따라 웃는다
토요일 오후,
나른하기 짝이 없는 봄날.








비극적 삼각관계


암탉 같은 어머니 모로 누워 계신다.
짧은 벼슬을 내려놓고
쭈글쭈글해진 배를 땅바닥에 철퍼덕
모가지를 조여대는 출산에 쓰이는 천조각

막 낳은 단조로운 흰 달걀 하나가
아직 뜨끈뜨끈한 김을 내며
「아버지, 저를 죽여 주세요」
긴장형 조발성 치매증을 앓고 있다.

긴 장화를 신고 난자를 멸시하셨지
휘청거리는 해골을 덜렁덜렁
상스럽게 쓰던
아버지, 아버님, 오, 무자비한……

어머니 짧은 벼슬을 푸르르 떨며
어쩌다가 씨앗이 우리를 경멸하게 되었는가.
흘러가던 구름 몇점이
똥을 찍- 갈기고 간다.





매음녀 3

소금에 절었고 간장에 절었다
숏타임 오천원,
오늘밤에도 가랑이를 열댓번 벌렸다
입에 발린 ××, ×××
죽어 널브러진 영자년 푸르딩딩한 옆구리에도 발길질이다
그렇다, 구제 불능이다
죽여도 목숨값 없는 화냥년이다
멀쩡 몸뚱아리로 뭐 할 게 없어서
그짓이냐고?
어이쿠, 이 아저씨 정말 죽여주시네






그래도 희망을 보이기도 했는데,




지나간 우리 시간은 일회용 밴드
봉합되지 않은 상처가 잠시 기대었던 자리
너를 만났고
너와 협상했던 세균지대.

총부리와 자갈무더기 톱니 속을 돌며
우리가 나누었던 저주와 증오,
이렇게 말해도 될까, 사랑의 격전지.

나는 빨리빨리 늙어
갈고리 구름을 지우고 싶다

상처 속 어디엔가 숨죽여 살아 있는
제 3의 살을 위하여
묵은 나를 들춰 밴드를 뜯는다
용서를 비는 듯
떨리는 어깻죽.

- 제 3의 살에게








결국, 삶을 놓고 말았습니다.



이마에 재 뿌리고
쑥향과 빈 촛대 들고
들판으로 갔다.

나는 밀기울 껍데기로
홑껍데기로
주여,
용서하소서.

어두움 실핏줄이 터져
못 이길 두려움에
혼절할 듯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주여, 용납하소서.

바람이 죽은 날들을 닦았다.
나는 혼신을 다해
촛대 위로 올랐다.

불을 그어다오.

- 終身

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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