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면 되리라
2001년 6월 16일
그저껜가
집에서 빈둥대는 꼴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아내의 성화에
타박타박 길을 나섰어
전대 도서관은 시험 때라 가봐야 별무소득이란 얘길 들은 터라
어디를 가야할지 난감하더군.
여차저차 물어물어 중앙도서관이라는 곳에 갔어.
젊은 사람들이 책상에 다닥다닥 앉아 열심이더군.
존경과 감탄해 마지 않는 고미숙 선생의 '19세기 시조의 예술사적 의미'를 한참 읽다가
문득 느낀 것이
참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별 것 아니구나. 이렇게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 싶더라구.
주변의 사람들이 두꺼운 영어단어 외우는 책이나, 갖가지 공무원이 되는 길이 있는 책이나, 컴퓨터와 그 쓰임에 관계된 책들을 보고 있더라구. 일일이 다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대개 이 세 범주를 벗어나질 못해.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는 저기 멀리서 맴맴일뿐
내 속에선 부끄러움과 서글픔이 이리저리 뛰더라구.
아. 이리도 자기 앞가림을 위해 열심들이구나.
나만 혼자 도끼자루를 썩히는구나.
참담과 처량함에 숙였는지 졸려서 그를 쫓아보려고 그랬는지
고개를 푹 쳐박고는
간만에 지녀간 박재삼 시집을 읽었어.

갑자기 니가 보고싶잖아.
술한잔에 등이나 툭툭 두드려주고 싶어져.
짠한 놈.
시인의 말씀대로 다른 작정 말고
꿀꺽꿀꺽 마셔버려.
널린 것이 인연이여.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는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 '천년의 바람',민음사. 박재삼
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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