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를 사랑했네
2001년 7월 8일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슬픈 여자.



토요일은 아내의 생일이었네. 지금은 일요일 새벽 세 시를 십오분 앞둔 시간인데, 결혼식 후 간만에 아내의 친구 둘이 인천에서 광주까지 먼 길을 와 안방에서 두런두런 얘기들을 하고 있어.
그녀들과 매취순을 몇 잔 했더니 잠이 좀 오는 듯도 하지만, 목전에 다다른 논문을 쓰려다가 오랜만에 오규원을 보네.
문지 시선 4번인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는 제목이 꼭 순정만화 같아 기분이 편하네만, 오규원은 그의 꼬장한 생김처럼 좀 까탈스레 읽히네. 조근조근 읽어가다 보니 예전에 좋아해서 눈에 익은 시가 있어 이렇게 적어 보았어.
어느 드라마에서 슬쩍 지나가던 기억이 있는데, 제목은 '한 잎의 여자'이네.
예전엔 연애하던 그 여자를 대입시켜보고 시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보니 그 여자도 누구도 아닌 것 같아.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상상이 안 되네.
누구도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데 또, 영원히 혼자 가지다니
피그말리온이 만든 사람되기 전의 상아처녀가 아니고서야 어디 그런 여자가 있을까.
어린 시절 파릇하고 새콤하며 아련한 기억에 젖어 들던 때가 신간 편했을지도 모르겠네.
이제사 다시 이 시를 보니 그 여자는 떠오르지 않고,
딱 '야!이노마'의 광년이가 떠오르는군.
우리는 무엇에 미쳐 있고
미쳐가는 걸까.
지금 하는 짓이 나중 부끄럽지 않기를
다만 바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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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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