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고샅길

덜그덕 2004. 10. 27. 14:52
고샅길
2001년 8월 22일
속으로 영글지도 못한 채
한국 사회는 겉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불과 몇 십년 전의 사람들의 다 가난한 세상사가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대학교 2학년 때 샀던 노트북은 이제 워드 기능도 못한다. 아는 선배는 5만원 주고 고철로 넘겼다 하고, 나는 그 기회도 못 잡아 그냥저냥 방구석에 굴린다.
다 촌놈이었다. 다 농부를 아버지 어머니로 둔 사람들이었다. 도시 사람은 귀했다.
지금은 촌사람이 귀하다. 농사일이 천하의 대본이라는 인류 역사 이래 수천년의 진리는 불과 수십년의 산업화로 간단하게 사라졌다.
너나나나 인터넷 서핑은 곧잘 해도
벼, 보리 구별도 못한다.
너도나도 겉도는구나.

고샅길이란 말은 얼마나 정겨우면서, 또 얼마나 휑뎅그렁한지.
처마가 서로 닿을 듯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옛 마을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고샅길이다.



겨울해 짧다 해도 금방 출출해진다
나라 일보다 먹는 일이 크다
칠봉이하고 장표네 집에나 가볼까
그 집구석은 마루턱 바랭이밭을 지나야 하니
이리저리 고샅길 잘도 감돌아야지
언 데 녹아 붉은 흙 질척거리는데
이 흙에 목 달아매고
대대로 살아오니
우리 동네 고샅길 한 모퉁이에도
네 추위 내 더위 다 고개 숙여야지
어언간 세월이야 잘도 흘러서
어린 시절에는 고샅길 지나노라면
으레 도란거리는 소리 들렸으나
호랑이 장가가는 이야기
누나 업어가는 이야기 들렸으나
이제야 노는 날 하루 텔레비에서
농구 배구 중계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감기 걸린 칠봉이 기침소리가 사람 같구나
우리는 장표네 집에 가서도
묵내기 막걸리내기 할 수 있을까
그 집도 점보농구에 딱 늘어붙어 있지 않을까
아 사람이 무엇한테 자꾸 지고 있구나

'고샅길', 고 은.「전원시편」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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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g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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